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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04] ‘나는 항상 인도주의 활동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첨부파일 : 598db4f23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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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7-09-04 작성자 : 유엔난민기구 조회 : 1626

‘나는 항상 인도주의 활동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엔난민기구의 1만 1천명의 직원 중 87 퍼센트가 현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예멘의 현장 담당자 아뎀 샤키리를 만나보자. 



 

 이름: 아뎀 샤키리. 41세. 구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출신 
 직책: 예멘 현장 담당자. 6개 행정 구역의 국내 실향민 보호와 원조 제공 담당 
 유엔난민기구에서 근무한 기간: 10년. 수단 다르푸, 리비아, 레바논, 요르단, 스위스 제네바 본부 근무 


왜 국제 구호원이 되었나? 

나는 구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에서 태어나, 코소보 내전 당시 실향민과 난민 들의 삶이 어떠한지 직접 목격하였다. 몇 주 동안 매일같이 계속해서 마을로 들어오는 버스가 있었다. 버스에는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이 코소보를 떠나며 챙긴 소지품 몇가지와 옷이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타고 있었다. 나와 내 친구들을 포함한 많은 마을 사람들은 버스가 도착하면 음식과 물을 나누어 주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던 그 순간 처음으로 구호 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행복한 얼굴을 보았던 그 순간 이후로 나는 항상 인도주의 활동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하면서 가장 보람되거나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

석 달 전, 모카에 간 적이 있다. 더위 속 나무 아래에서 살고 있는 국내 실향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표정을 볼 수 있었는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은 그저 매트리스와 이불에도 좋아했다. 하지만 항상 부족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숫자는 너무 많았다. 2백만 명 이상이 실향민이 되었다. 가장 힘든 것은 이들 모두를 도울 수 없다는 점이었다. 두 가족이 도움이 필요하면, 이들 중 더 취약한 한 가족을 선택해야 했다. 




아뎀 샤키리(중앙, 파나색 체크무늬 셔츠)가 예맨 카미르에 위치한 임시 거주지의 국내 실향민 300 가족에게 구호물자를 전달하기 위해 토지 소유자와 정부 당국과 함께 협상하고 있다. ⓒ UNHCR 


다르푸 서부의 수단-차드 국경지역에서 온 차드 난민을 모르네이 난민 캠프로 이동시키고 있다. ⓒ UNHCR 



일하면서 가장 좋았던 날은 언제인가? 

2012년 당시, 나는 리비아 토브럭에서 근무했다. 국경에 도착하는 시리아 난민들의 입국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나는 12살에서 16살 정도 된16명의 아이들이 부모가 없이 홀로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아이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볼 때면, 항상 내 아이들이 생각난다. 우리는 이 아이들을 전부 트리폴리로 데려와 가족들과 재회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날이 내가 유엔난민기구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이었다. 아이들이 가족들과 다시 만났을 때, 정말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았다.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날은 언제인가?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날은 전에 일하던 근무지에서 있었다. 국가 안보 경찰들이 가족들을 먹이기 위해 양을 훔친 15살 국내 실향민 아이를 체포한 사건이었다. 아이는 경찰들에게 사나흘을 심하게 폭행당해 내부 출혈이 있는 상태였다. 내가 이 사건에 대해 접했을 때, 아이는 현지 병원에 있었다. 나는적절한 치료를 위해 아이를 수도에 있는 다른 병원으로 옮기려고 곧바로현지 공무원들과 함께 찾아갔다. 하지만 경찰들은유엔난민기구에서 이송비용을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를 협박하고아이를 풀어주지 않았다. 나는 이틀 동안 아이를 병원에서 데리고 나오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이는 결국 내부 출혈로 사망했다. 만약 아이가 병원을 나왔다면, 아이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아이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 아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나는 눈물이 난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로 인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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