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27] 모잠비크의 난민 아동에서 미국 초등학교 교장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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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9-02-27 작성자 : 유엔난민기구 조회 : 19445
모잠비크의 난민 아동에서 미국 초등학교 교장이 되기까지
버틴 바히지(Bertine Bahige)는 재정착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었다. 콩고 난민 출신인 그는 자신이 미국 와이오밍주를 고향으로 부를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콩고민주공화국 부카부(Bukavu)에서 자란 버틴 바히지는 의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13살 버틴의 앞날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적어도, 그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에 위치한 그의 마을에 마이마이(Mai Mai) 반군 집단이 습격해 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신병을 강제로 납치하던 날, 모든 것은 바뀌었다.
“부모님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동시에 내 자신이 이제 곧 평생 알아오던 모든 것과 완전히 멀어지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가장 힘든 일이었습니다.” 목이 메인 목소리로 버틴은 회상했다.
버틴은 반군에 붙잡힌 채로 2년을 보냈다. 그는 붙잡힌 아이들이 서로를 위협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공포에 떨었다. “그 안에서 더 높은 계급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비정해져야 했지만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버틴은 회상한다. 그는 폭력을 견딜 수 없었고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이게 끝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기회를 잡아야 했습니다.” 그는 말한다.
“새 삶을 살 기회가 저에게 주어졌고, 그 기회를 저는 최대한 활용하고 싶었습니다”
버틴은 공짜로 자신의 배를 내어 준 한 친절한 어부의 도움을 받아 탕가니카(Tanganyika) 호수를 건넌 후 소금에 절인 물고기로 가득한 트럭 뒤칸에 숨어 그렇게 수천 킬로미터를 달아났다. 사흘 동안 버틴이 먹은 것은 그 절인 물고기뿐이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고급 생선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낙천적인 버틴은 그렇게 말했다.
탈진하여 기절 직전이었던 버틴은 나무 옆에서 쓰러졌다. 다시 일어났을 때, 그의 주변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느 나라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모잠비크였다. 버틴은 유엔난민기구에서 운영하는 마푸토(Maputo) 난민촌에서 5년을 보냈다.
이 콩고 난민 소년은 특히 학업을 이어가는 문제로 걱정하고 있었다. 난민촌에는 중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몇 차례의 인터뷰 후 버틴은 자신이 “재정착 대상으로 추천”될 것이라 듣게 되었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다.
2017년, 1퍼센트 미만의 난민들만이 제3국으로 재정착했다. 전 세계 35개국에서 유엔난민기구의 재정착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미국이 가장 많은 재정착민을 수용해왔으며, 캐나다와 호주 그리고 북유럽 국가들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콩고 난민 출신의 버틴 바히지(38)와 그의 딸 지젤(8)이 뉴욕의 구겐하임 박물관을 방문하고 있다 ⓒ UNHCR/Marta Martinez
2004년, 버틴은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먼저 고층빌딩들을 찾았다. 항상 상상은 해왔지만 직접 볼 수는 없었던 것들이었다. “이제 나는 안전하다”라는 따뜻한 감정이 그의 안에서 자라났다.
버틴의 첫 직장은 버거킹이었다. 그는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일에서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승진을 거쳐 계산대에서 일하게 되었다. “저는 항상 다음 단계를 향해 스스로 도전했습니다.” 버틴은 말한다. “배울 수 있는 기회, 새 삶을 살 기회가 저에게 주어졌고, 그 기회를 저는 최대한 활용하고 싶었습니다.”
세 군데 직장에서 동시에 일하며, 버틴은 커뮤니티 칼리지(Community college)에 들어갔고 단 한번도 수업에 빠진 적이 없었다. 차가 없었기 때문에 저녁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자전거로 거의 10 킬로미터를 달려야 했다.
우수한 학업 성적을 보인 덕에 그는 와이오밍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버틴은 이 외진 주에 대해 잘 몰랐고, 친구들 역시 그가 가게 될 곳을 설명할 때마다 잘못 알아듣고는 “마이애미로 가는 거야?”하고 되물었다.
“난민들이 원하는 것은 기회, 단지 그뿐입니다.”
그러나 곧 와이오밍은 버틴의 고향이 되었다. 와이오밍 대학에서 그는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수학과 수학교육을 전공한 후 와이오밍 질렛(Gillette)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제 버틴은 두 아이의 아버지이며 로하이드(Rawhide) 초등학교의 교장이다.
“이 나라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저에게 기회를 주었고 제 자신답게 살 수 있도록 축복해주었습니다.” 버틴은 말한다. “그것을 돌려주는 일이 시민으로서의 제 의무이고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뉴욕을 방문한 버틴은 내내 커다란 C 두 개가 수놓아진 노란색과 보라색 줄무늬의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바로 그가 10년간 수학을 가르쳤으며 지금까지도 방과 후 축구를 가르치고 있는 고등학교의 상징이다. “고향에서 무언가라도 가져와야 했어요.” 그는 말한다.
버틴이 뉴욕에 온 것은 유엔 본부에서 그의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난민 글로벌 컴팩트’라고 알려진 새로운 국제적 합의를 지지하기 위해서이다. 이 글로벌 컴팩트는 난민과 난민을 수용하는 국가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난민 글로벌 컴팩트가 추진하는 해결책 중에는 버틴의 경우와 같은 재정착의 기회를 늘리는 방안도 포함되어 있다.
“난민들이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오해가 많습니다 - 난민들이 원하는 것은 기회, 단지 그뿐입니다.” 버틴은 말한다. “때로 우리는 이 문제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비용’이 얼마일지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방향에서는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난민들이 가져올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들이 어떻게 우리 공동체를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그가 겪었던 일들 덕분에, 버틴은 위기에 처한 아이들과 일하는 것을 매우 즐긴다. 그리고 다른 교사들보다 그들과 더 깊이 교감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방향에서는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난민들이 어떻게 우리 공동체를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인지, 세상 모두가 나를 등진 것 같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그리고 영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의 마음은 어떠한지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말한다. “이는 또한 제가 그들 뒤에 있을 것이며 함께 조금씩 문제를 해결해나가 결국 성공하리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줄 기회이기도 합니다.”
버틴의 옛 제자들은 종종 그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러 찾아오곤 한다. 심지어 졸업 후 수년이 지난 후에도 말이다. 그들은 소셜 네트워크에서 버틴의 가장 큰 지지자 역할을 하며 항상 그에 대한 칭찬의 댓글을 아끼지 않는다.
구겐하임 박물관을 방문한 버틴은 그의 여덟 살 난 딸 지젤과 추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어린 지젤의 눈에는 분홍색과 노란색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편 그림으로 보이지만 버틴에게는 오히려 굴처럼 보인다. 난민 출신 버틴은 예술이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우리는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그림들을 둘러보면서, 버틴은 대화를 통해 지젤의 관점을 배우고 또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준다. 여행을 하는동안에도 버틴은 선생으로서의 모습을 버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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