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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한국인 예다씨, 왜 무국적 난민을 택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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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4-07-17 작성자 : 유엔난민기구 조회 : 6883

원문보기: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35593.html

 

한국인 예다씨, 왜 무국적 난민을 택했나

 

 

▲ 병역거부를 결심한 이상민(가명)씨. ⓒ정용일

 

한국은, 당신을 위한 국가입니까?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다면, 당신도 한국으로 건너온 난민들과 비슷한 처지일지 모릅니다. <한겨레21>은 군대를 거부할 길이 없거나, 너무 엄격한 성(性) 변경 요건을 요구하는 등의 이유로 최근 국외에서 난민이 된 한국인 청년들의 사연을 단독 취재했습니다. 난민이 된다는 것은,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국적’을 버리고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기획 연재 ‘국민과 난민 사이’ 마지막 회에서는 이렇게 쉽지 않은 선택을 한 한국인들의 사연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들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또다시 불편한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한국은, 정말 당신을 위한 국가입니까? _편집자

 

예수와 붓다에서 따왔다 했다. 깊은 뜻이 담긴 이름 같았다. 이예다(23)씨는 이름을 지어준 부모님과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지난 8월에 찾은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엔 이름 모를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2층 터미널 인근 관광안내소 앞. 여행객으로 보이는 젊은 한국인 커플이 조잘거리며 지나간 자리로, 예다씨가 나타났다. 그는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난민이다. 기자와 마주하기 두 달 전, 프랑스 난민·무국적자보호사무국(OFPRA)으로부터 난민임을 인정받았다. 난민신청서를 제출한 지 7개월 만이었다.

 

그는 ‘조국의 배신자’인가?

 

1년 전, 인천공항을 떠난 예다씨가 이곳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입대를 두 달 앞둔 때였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군대만큼은 절대로 갈 수 없다는 결심을 굳혔다. 70만원을 들여 파리행 비행기 티켓을 샀다. 편도였다.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 했다. 사회보장 체계가 잘 갖춰져 있다는 프랑스를 택했다. 혹여라도 난민이 되지 못한다면 이의신청을 하고, 그도 안 되면 다른 나라로 가거나 어디 숲 속에라도 들어가 살 생각이었다. 그는 특정 종교 신도도, 성소수자도 아니다. 사회운동단체에서 활동해본 경험도 없다.

 

“중학교 때, 불교에 대해 배우면서 어떤 생명도 죽이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강제적 징병제도는 사람을 죽이도록 훈련하는 일이며, 이는 제 신념과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강제적 병역 의무는 어른으로 가는 통과의례와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역 의무를 ‘성스럽게’ 여깁니다. 병역을 끝낸 사람들은 ‘군대를 갔다 온 남자’와 ‘군대를 갔다 오지 않은 사람’(여성과 장애인도 포함) 간의 차별을 만듭니다. 한국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조국의 배신자’와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힙니다. 두 낙인은 어디나 따라다니게 되며 차별의 대상이 됩니다.”(이예다씨 난민신청서 중)

 

처음부터 국적을 버리려 했던 것은 아니다. 군대를 가느냐 마느냐의 고민이 시작된 건 2년 전이었다.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조차 몰랐던 시절이다. 어릴 때부터 군 입대가 꺼려졌다. 아무 이유 없이 작은 벌레도 죽일 수가 없는데, 총을 들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전투병이 아닌 의료 분야에서 복무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봤다. 그러다보니 대체복무제가 왜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누구인지 알게 됐다.

 

프랑스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한국에서 못다 읽은 책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이자 평화연구가 임재성씨가 펴낸 책이다. 예다씨는 1991년생이다. 그가 태어난 해에 일어났다는 일이 자꾸 현실과 겹쳐졌다. 위안보단 서러움이 밀려들어 눈시울을 붉혔다. 1991년 4월, 학원 자유화 투쟁에 참여한 명지대 1학년 강경대는 백골단 소속 사복 경찰로부터 쇠파이프로 구타당해 숨진다. 같은 해 5월4일, 서울시경 제1기동대 1중대 박석진 일경은 ‘더 이상 국민과 학생들을 상대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싸울 수 없다’며 근무지를 이탈해 양심선언을 한다. 국가는 박 일경을 범죄자로 규정했다. 전투경찰대 설치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돼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것이다. “군대를 안 갔을 뿐인데, 나도 범죄자가 됐다. 그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음에도 바뀐 게 정말 없구나….”

 

“저도 당연히 무서웠어요”

 

 

공항을 나와, 파리로 향했다. 숙소를 잡은 뒤, 곧바로 난민 신청 절차를 알아보았다. 파리에선 난민 신청을 도와주는 단체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수중엔 어머니가 쥐어준 50만원뿐이었다. 잠자리를 구하지 못한 밤엔 노숙을 하기도 했다. 5개월쯤을 기다려 난민신청자에게 주는 주거지에서 머물 수 있게 됐다. 프랑스에서도 난민신청자들의 구직 활동은 금지된다. 그러나 생계비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호소했다. 눈 딱 감고 군대에 다녀온 뒤, 잘못된 점을 조금씩 고쳐나가면 안 되느냐고. 때론 남들 다 가는 군대를 가지 않겠다며 나라와 가족마저 떠나느냐고 화를 내기도 했다. “저도 당연히 무서웠어요. 심지어 영어도 완벽하게 안 되고, 프랑스어는 더더욱 안 되고. 그래도 군대에 가기는 싫었고. 그 때문에 내 자유를 뺏기는 것도 싫었어요.”

 

처음부터 국적을 버리려 했던 것은 아니다. 군대를 가느냐 마느냐의 고민이 시작된 건 2년 전이었다.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조차 몰랐던 시절이다. 어릴 때부터 군 입대가 꺼려졌다. 아무 이유 없이 작은 벌레도 죽일 수가 없는데, 총을 들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군대에 가지 않을 ‘자유’. 군대에 가지 않았다고 해서 감옥에 갇히지 않을 ‘자유’를 갈구하는 건 ‘미친’ 짓일까. 유엔 인권이사회와 유럽인권재판소에선 2008년 이후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벌을 ‘자의적 구금’으로 본다. 오재창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는 양심적 병역거부자 처벌을 자의적 구금으로 해석하는 까닭에 대해 “병역거부를 거주 이주의 자유처럼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 보기 때문”이라며 “이러한 자의적 구금이 계속되는 건 문명국의 수치”라고 말했다. 지난 10월8일 또 한 명의 청년이 군대에 가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알바연대’ 활동가 박정훈(27)씨다. 박씨는 군 입대일에 맞춰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내가 지키고 싶은 나라는 이런 야만적인 곳이 아니다”라고 성토했다. 올해 초,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양심적 병역거부자 50명은 ‘한국 정부가 국제 규약을 어기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자의적으로 구금했다’며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에 청원을 냈다.

 

예다씨에게 ‘난민’에 대해 일러준 건, 같은 고민을 해온 친구 이상민(가명)씨였다. 그 역시 군대를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학을 졸업하는 대로 국외로 나가 난민 신청을 할 생각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서울 용산 참사를 마주했다. “철거민들이 살기 위해 (망루) 위로 올라간 거잖아요. 국가가 개입해 사업을 하기 전까진 평범하게 살던 사람들이라고요. 국가가 벼랑 끝에 몰아놓고 생명이 떨어졌는데, 그 사람들 탓으로 돌려버리는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어요.” 병역거부를 생각하면서 처음엔 이민을 생각했다. 체류 자격을 뒤지다보니 난민에 대해 알게 됐다. 그즈음 2009년 캐나다 이민·난민심사위원회(IRB)로부터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는 김아무개(당시 28살)씨의 사연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김씨는 양심적 병영거부자이자 성소수자였다.

 

이 세상 어딘가, 한국인 난민들

 

어릴 때부터 국가에 대한 생각이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숙제로 내준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던 날이었다. 아버지가 물었다. “너 정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거야?” 어린 마음에도 ‘한두 개 정도 바치는 건 모르겠는데 모두 바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싶었단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차마 군대에 가라곤 못하겠다’ 하신다. 다만, 상민씨가 낯선 세상에서 고통스러워할 것을 걱정해 ‘감옥행’을 추천하기도 한다. 하나뿐인 아들의 결심을 어머니는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숙제로 내준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던 날이었다. 아버지가 물었다. “너 정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거야?” 어린 마음에도 ‘한두 개 정도 바치는 건 모르겠는데, 모두 다 바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싶었단다. 아버지는 상민씨가 낯선 세상에서 고통스러워할 것을 걱정해 ‘감옥행’을 추천하기도 한다.

 

올해 들어 난민이 된 한국인은 예다씨뿐만이 아니다. 지난 4월 병역거부자이자 성소수자로 살아온 김인수(34·가명)씨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았다(971호 사람과 사회 ‘한국인 인수씨는 왜 난민이 됐나’ 참조). 트랜스젠더(성전환자) 중에서도 최근 국외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신원 노출을 극도로 꺼렸다. 현재 거주하는 나라조차 밝히지 말 것을 요청했다. 난민 심사 과정에서 한국 상황에 대해 의견서를 제출한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 소속 류민희 변호사는 “한국의 성(性)별 변경 요건이 매우 엄격한 점, 외모와 일치하지 않는 신분증명서상 성별 때문에 직업을 구하기 어려운 점, 성전환 수술이 고비용임에도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기 쉬운 점, 차별금지법이나 혐오범죄법 등 성소수자에 대한 법적 구제 수단이 부재하다는 점 등이 종합적으로 검토돼 해당 국가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 지난 5월 프랑스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예다씨. 프랑스 난민·무국적자보호사무국(OFPRA)이 발행한 문서에는 그가 난민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기재돼 있다. 사진 이예다 제공

 

현재 트랜스젠더의 성별 변경을 위한 법률은 따로 없다. 2006년 대법원에서 성별 변경을 허가한 판례가 나온 뒤, 개별 법원의 판단에 따라 성별 변경이 결정된다. 대부분의 경우, 대법원이 제정한 ‘성전환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가족관계등록 예규 346호)을 따르게 된다. 대법원 예규는 성별 정정 허가 요건 중 하나로 ‘생물학적 성별과 반대되는 외부 성기’를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2008년 국가인권위원회는 대법원장에게 “호르몬 치료 등 성전환을 위한 의료 조치를 한 사람에게 성기 성형까지 요구하는 것은 인권침해 요소가 있다”며 예규 개정을 권고했다. 그해에도 난민이 된 성소수자가 있었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난민재심재판소(RRT)는 트랜스젠더의 특성을 지닌 동성애자 한국인 남성에 대해 난민 지위를 인정했다. 판결문을 보면 “한국에서 동성애는 불법이 아니고 차별로부터도 약간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동성결혼이 허용되지 않고 커밍아웃이 어려운 보수적인 국가”라고 평가했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이민을 가지만 사실은 난민인

 

아무 변화 없이 흐르는 세월은, 우리 사회가 변할 것이라는 ‘희망’이란 단어에 먼지를 덧씌운다. “쉽게 바뀌지 않는 걸 알더라도 노력하면서 살 의향이 있는데, 아무런 타협책도 없이 벼랑 끝으로 모니깐. 보통 사람들은 ‘그 정도도 못 참냐’고 할 상황이 저한테는 벼랑 끝이었으니까, 결국 쫓겨나간 거죠. ”예다씨가 말했다. 상민씨는 좀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낸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복지를 강화하는 나라가 될까요? 조금씩 변하기야 하겠지만 역사를 되짚어보면 100년, 200년은 걸리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가 사는 동안엔 큰 변화가 없겠죠. 내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어요.”

 

양심적 병역거부자나 성소수자가 아니더라도, 이미 한국을 떠났고 또 떠나가길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겨레21>이 ‘두잇서베이’와 함께 지난 9월16∼23일 10대 이상 7707명을 대상으로 ‘기회가 있으면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다?’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한 응답자(60.8%)는 ‘그렇지 않다’고 한 이들(22.7%)보다 3배나 많았다. 연간 1만5천여 명에 달하는 자살자는 이러한 숨쉴 구멍조차 찾지 못한 사람들 아닐까.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동성애자의 경우 난민 형태가 아니더라도, 네덜란드같이 동성애 결혼이 합법화된 나라에서 가정을 꾸리고 정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며 “발달장애 아동을 둔 부모들은 지원 시스템이 잘 갖춰진 캐나다로 떠나기도 한다”고 전했다.

 

예다씨를 만난 지 두 달이 흘렀다. 그동안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매주 5일 동안 베이글을 파는 가게에서 하루 종일 밀가루를 반죽한다. 이곳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이주노동자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아직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보니 자주 무시당한다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한국에 비하면 급여나 노동 환경이 훨씬 나은 편이다. 10년 체류권(갱신 가능)을 받은 그는 프랑스 저소득층이 받는 사회보장 수급자가 됐다. 외롭지는 않을까. “한국에서도 외로운 건 마찬가지였어요.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까.” 난민으로서의 삶은, 그때까지 맺어온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고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나라를 갈 수 있어도 한국으론 갈 수 없다. 예다씨는 한국을 떠나기 전에 정말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이상 되돌아오지 못할 걸 예감했다. “일부러 제가 좋아했던 우리 동네를 자주 돌아다녔어요. 친구와 함께 새벽에 돌아다니면서 떠들곤 했는데 똑같이 한 거죠. 비가 오는데도 새벽에 맥도널드에서 군것질을 하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얼굴과 이름을 가리지 않으셔도 돼요”

 

프랑스에서 난민으로 살았던 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은 “세월이 흘러도 ‘한국어로 생각하는 존재’라는 점은 변하질 않았다”고 회상했다. “내 아이들은 아비 때문에 자기들이 선택하지 않은 땅에 오래 살게 되면서 결국 프랑스어로 사유하는 존재가 됐다. 그래서 나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됐을 때 돌아왔지만, 아이들은 그 곳에 계속 남아야 했다.”

 

“얼굴과 이름 가리지 않으셔도 돼요.” 당연히 익명을 요구할 줄 알았던 예다씨가 말했다. 가족에게 미안하고, 듣지 않아도 뻔한 날선 비난이 두렵기도 하다. “저는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예요. 그런 사람도 다른 나라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을 만큼 상황이 심각하구나. 단 한 명이라도 그렇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내가 나선다고 바뀌진 않겠지만, 바뀔 가능성이라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스스로 떠나온, 아니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국가를 향해 꼭 하고 싶었던 말이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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