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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문]콩고 난민 미야 “한국은 내 집… 이젠 아이들의 조국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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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6-11-18 작성자 : 유엔난민기구 조회 : 8468

콩고 난민 미야 “한국은 내 집… 이젠 아이들의 조국이죠”


콩고민주공화국 난민 미야씨

미 스파이로 몰려

목숨 건 탈출 감행

7년 만에 난민 인정

에코팜므 직원으로 새 삶

“자매애가 큰 힘…

이제는 어엿한 아티스트”



사회적기업 에코팜므 직원으로 일하는 콩고 출신 난민 미야(오른쪽 둘째)씨가 세밑인 지난해 12월 29일 서울 마포구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콩고의 연말 파티'를 마친 후 박진숙 대표(맨왼쪽)를 비롯한 직원들과 한자리에 모였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여성신문은 새해를 맞아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보듬는 다양한 연재물을 기획, 보도한다. 첫 회로 난민 여성과 그녀를 보듬는 한국 여성들의 이야기를 취재했다. 지난해 12월 재정착 난민 지원 제도에 따라 미얀마 난민 4가족 22명이 입국하면서 난민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한국은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시행했으나 제도가 미흡하고, 사람들의 편견도 심해 실제 한국에 정착한 난민은 극소수다. 저출산으로 국가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난민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다양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콩고민주공화국 난민 미야씨의 한국 정착기를 취재했다.

11년 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명문 킨샤사대학을 졸업하고 미 대사관에 근무하던 스물여덟 살의 한 여성이 스파이로 몰렸다. 미국에 정보를 전해주고 반정부 시위를 선동했다는 혐의였다. 세계 무대에서 비즈니스를 꿈꾸던 여성의 날개는 무참히 꺾였다. 경찰에 쫓기던 여성은 목숨을 건 탈출에 나섰다. 친구의 도움으로 무작정 탄 비행기는 한국으로 향했다. 혈혈단신 조국을 빠져나와 낯선 땅 한국에 정착한 그가 이제는 ‘안산댁’이 다 됐다. 사회적기업 에코팜므 직원인 미야(39)씨 이야기다.

세밑인 지난해 12월 29일 오후, 서울 마포구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열린 ‘콩고의 연말 파티’에서 만난 미야씨는 “재밌어요?” “큰 박수” 등의 한국말로 참가자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는 꽤 괜찮은 사회자였다.

그는 경기도 안산에서 남편(42), 초등학생인 두 아들 제제(10), 마크(8)와 함께 살고 있다. “한국은 내게 두 번째 집이죠. 한국에서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아 길렀죠. 아이들에게 고국을 물으면 한국이지, 콩고라고 말하지 않아요.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라선지 사고방식도 똑같아요.”

미야씨는 “에코팜므 직원들과 나눈 자매애가 제2의 삶을 개척하는 데 큰 힘이 됐다”며 “행복하다”고 했다. 고된 한국 생활에서 자신을 보듬는 여성들 덕에 오늘까지 왔다는 것이다. 난민 지원 단체인 피난처에서 활동하던 박진숙씨(에코팜므 대표)는 미야씨를 처음으로 자기 집에 초대한 한국 사람이었다. 그렇게 소중한 인연을 맺었고 한국어도 배웠다. 미야씨는 에코팜므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난해 정식 직원이 된 그는 이젠 연락이 갑자기 끊긴 다른 이주여성들도 챙겨줄 만큼 든든한 지원군이다.


미야(왼쪽 둘째)씨는 "에코팜므 직원들과 나눈 자매애가 제2의 삶을 개척하는 데 큰 힘이 됐다"며 "행복하다"고 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난민을 돕는 NGO 직원들은 한국에 뿌리내리는 데 굉장히 큰 도움을 줬어요. 고마운 사람들이죠.” 한국에 살고 있는 콩고인들의 모임에서 남편도 만났고,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그는 요즘 아프리카의 정서가 깃든 아트 상품과 수공예품을 만들어 보급하고 있다. 자신의 그림으로 전시회도 열었고 디자인으로 옷도 만들었다. 숨겨진 재능을 발견한 것이다. 동료 직원 김보은씨는 “미야씨는 아프리카의 다채롭고 아름다운 문화를 전하는 문화 전령사”라고 말했다.

낯선 땅에서 난민이자 아프리카인이자 여성인 그는 삼중의 편견과 차별을 겪었다. “난민은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는 편견이 강해요. 아프리카 흑인은 일자리 구하기가 더 어렵죠. 지금 공장에서 일하는 남편도 ‘아프리카인은 채용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어요. 더욱이 여자는 아이나 기르는 약한 사람, 경험도 많이 못했을 거라는 편견에 갇힌 사람들이 많아요.”

한국에 정착하긴 쉽지 않았다. 미야씨의 피부를 불쑥 만지곤 뭐가 묻어났는지 자기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빵과 우유만 먹으며 여관에서 두문불출한 적도 있었다. “이웃과 어울리고 싶었으나 한국 사람들이 나를 밀치고 막아내는 벽 같았어요.” 당시를 회상하는 미야씨의 목소리에 울음이 배어 나왔다.

지난 1994년 난민 신청이 시작돼 2001년부터 난민을 인정하기 시작한 이후 2015년 5월까지 1만1172명이 난민 신청을 했으나 그중 496명만 인정을 받았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2010년 기준 세계 난민 인정 평균 수용률은 38%다. 난민 신청을 하면 1차 심사를 받는 데만 1년 넘게 걸리는 데다 자국에서 박해를 받았다는 근거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난민 인정 비율이 형편없이 낮은 것이다. 난민 불인정 결정을 통보할 때 영어로만 병기해준 관계로 30일 이내에 이의를 신청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사례도 많다.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이 시행됐고 지난해 12월 23일 재정착 1호 난민인 미얀마 출신 4가족 22명이 입국하면서 외견상으로는 ‘난민 인권 선진국’처럼 비치지만 실상은 후진국이라는 얘기다. 정부의 난민 심사 제도가 비효율적이라는 비판도 크다.

캐나다와 유럽연합은 난민 신청을 하는 동안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만 당시 한국에선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2013년 난민법이 시행되면서 난민 신청 후 6개월이 지나면 취업을 할 수 있고 일부 생계비도 지원받을 수 있지만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다. 미야씨는 “난민 인정을 받는 데 너무 오래 걸린다. 그런데도 난민 인정 비율은 4.4%에 불과하다”며 “한국은 난민들에게 차가운 나라”라고 했다.

부모와 형제가 12명인 대가족이 전 세계로 흩어지면서 콩고에 남아 있는 가족은 이제 단 3명뿐이다. 은행장이었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벨기에에서 살고 있다.

정치적 난민인 그는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했다. “난민은 거지나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교육을 받았고 감정과 욕구, 희망을 갖고 있으며 사람들이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주길 원해요. 그런데 정치적 난민을 범법자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미야씨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한국은 다문화 국가가 됐다. 다른 인종, 다른 관점, 다른 국적, 다른 개성 등 다양성을 이해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2016년 새해를 맞은 미야씨에겐 꿈이 있다. 한국문학을 공부하고 디자인도 배우고 싶다. 무엇보다 초등학생인 두 아들의 꿈을 응원하는 멋진 엄마이고 싶다. 그런데 가끔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숨이 턱턱 막힌다. “아이들이 원하는 길을 갈 수 있도록 끝까지 밀어주고 싶어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꿈을 이룰 수 있을까요?”

박길자 기자 (muse@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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