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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목숨 건 탈출보다 한국사회 ‘흑인 편견’이 더 무서웠죠”

첨부파일 : 00521624501_20141231.JPG

등록일 : 2014-12-31 작성자 : 유엔난민기구 조회 : 6859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women/671471.html

 

“목숨 건 탈출보다 한국사회

‘흑인 편견’이 더 무서웠죠”

 

 

콩고민주공화국 출신의 이주여성 미야.

 

스파이로 몰렸다. 경찰을 피해 도망다녔다. 외국으로 도망가야 했다. 친구와 공항에서 만나 여권과 비행기표를 건네받았다. 다행히 출국 과정에서 잡히지 않았다. 숨을 죽이며 비행기에 앉았다. 그때까지 자신이 어느 나라로 가는지도 몰랐다. 비행기표를 보니 한국행이었다. 목숨을 건 탈출이었다. 그렇게 한국에 도착했다.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낯선 땅이었다.


10년 전 조국 콩고민주공화국을 탈출해 한국에 정착한 미야(가명, 38)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대사관에 근무하던 엘리트였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콩고를 극적으로 탈출했지만 한국은 또 다른 감옥처럼 느껴졌다. 흑인에 대한 편견과 따돌림은 뼛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세월은 흘렀고,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획득했다.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미야는 이제는 자신처럼 낯선 한국에서 방황하는 이주여성의 정착을 돕는 일을 한다. 최근 사회적 기업인 ‘에코 팜므’의 정식 직원이 된 것이다.

 

명문대 나와 미국대사관 근무
10년 전 반정부시위 때 미스파이 몰려
무작정 탄 비행기 귀착지가 한국
콩고인 남편 만나고 5년전 난민 인정
이주여성 사회활동가 도움으로 정착
사회적기업 에코팜므 정식 직원 근무

 

10년 전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자 콩고 정부는 미국대사관에 근무하던 미야가 미국에 국내 정보를 전해주며 반정부 시위를 선동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미야의 아버지는 은행장이었고 어머니는 간호사였다. 억울했지만 자신의 혐의를 풀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킨샤사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미야는 무역업을 하고픈 자신의 꿈을 접고 혈혈단신 한국에서 살길을 찾아야 했다. 처음엔 여관에서 두문불출하며 빵과 우유만 먹으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우연히 나이지리아에서 온 아프리카인을 만났다. 그는 미야의 이야기를 듣더니 한국에 있는 콩고인들의 모임을 소개해 주었다. 대부분 독재정권을 피해 도망온 난민들이었다. 다행히 그 모임에서 지금의 남편 듀뱅(40)을 만났다. 남편 역시 내전을 피해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왔다고 했다.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돈을 버는 남편과 힘을 합쳐 마침내 5년 만에 난민 지위를 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흑인에 대한 편견은 극복하기 어려웠다.


우선 한국말을 배워야 했다. 미야처럼 이주여성들의 정착을 돕는 사회운동가를 만났다. 에코 팜므를 설립한 박진숙(37)씨였다. 에코 팜므는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이주여성을 상대로 상담을 하면서 예술적 소양을 발굴하고 발전시켜 창의적 작품 활동까지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는 단체였다.


미야는 이미 프랑스어와 영어를 잘했지만 박씨로부터 새로 한국말을 배우며 아프리카 정서가 깃든 아트 상품과 수공예품을 만들었다. 그림도 그려 팔았다. 자립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사이 아들도 두명(9살, 7살) 낳았다.


미야는 한국 사회에 할 이야기가 많다. “처음엔 한국말을 잘하고, 한국 사정에 익숙하게 되면 한국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한국인들의 흑인에 대한 편견은 너무 심했어요. 우리도 인간이고 같은 붉은 피가 흐른다고 외치고 싶었어요.”


미야는 자신과 같은 정치적 난민은 결코 범죄나 테러를 저지르고 도망온 범법자가 아니라는 것을 한국인들이 인식해줬으면 하고 바란다. 마치 범죄인 취급을 하는 분위기가 부담스럽기만 하다.


한국 사회는 자신에게 기회도 주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 말라는 가이드라인만 있었고, 뭘 하면 좋다는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너무 적응하기가 힘들었어요.”


미야는 무럭무럭 자라나는 두 아들도 걱정이 된다.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아들이 나중에 의대를 졸업해 의사가 됐을 때 과연 받아줄 병원이 있을지, 만약 취직이 된다 해도 흑인 의사에게 몸을 맡길 한국인 환자가 있을지, 걱정에 걱정은 꼬리를 문다.


“나중에 아들이 사랑한 애인의 부모가 아들을 ‘인간’(human being)으로 대해줄지도 걱정”이라는 미야는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누구에게나 같다”고 말하며 울먹이기도 했다. 심지어 에볼라 탓인지 지하철에서 코를 막고 숨을 멈춘 채 도망가는 야속한 한국인도 있다고 했다.


“이 사회에 봉사하고, 당당한 한국인으로 살 수 있도록 모두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그는 한국 어린이들이 아프리카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재미있는 동화를 쓰고 싶다고 했다.


“힘들여 찾은 자유를 한국 사회가 소중히 여겨주시길 바랍니다.” 미야는 매서운 추위보다는 높디높은 한국인들의 편견에서 자유롭고 싶다고 한다.


글, 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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