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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영어 잘 가르칠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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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4-07-17 작성자 : 유엔난민기구 조회 : 8459

원문보기: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5459.html

 

영어 잘 가르칠 수 있는데…”

 

 

“내가 밝아 보이나?” 연신 웃고 있던 얼굴이 이내 씁쓸해졌다. “걱정이 많긴 하지만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처졌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버마(미얀마) 소수민족 출신 난민인정자 줄리(가명·여)의 한국 생활은 어느덧 10년째다.

 

맨 처음 한국땅에 발을 디디던 날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반정부 활동 단체의 일을 도운 사실이 알려져 고향에서 살기 어려워졌다. 인천공항으로 입국한 뒤, 버마에서 온 사람들을 위한 쉼터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시 유엔난민기구(UNHCR)를 찾아 도움을 요청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UNHCR 서울사무소가 도무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난민 신청을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낯선 땅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건 간단치 않았다. 한국에서 처음 일하게 된 곳은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공장이었다. 휴대전화 케이스를 조립하는 일을 했다. 고용은 불안정했다. 두 달 동안 일하던 공장에서 잘린 뒤, 다섯 달 동안이나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받은 해고 통보

 

한국 생활 3년 만에 드디어 희소식이 들렸다. 난민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합법적 체류를 보장받게 되니 불안한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의료보험에도 바로 가입했다. 유독 병원에 갈 일이 많았던 그에겐 무척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6년가량이 흘렀다. 이제는 한국 생활이 좀 수월해졌을까?

 

“사실 지금 실직 상태다. 얼마 전까지 영어학원에서 일했는데, 사장이 경제적 사정이 있다면서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 갑자기 해고 통보를 했다.” 인터뷰를 하기 바로 전날, 그는 마지막 실업급여를 받았다.

 

줄리는 대학을 졸업했고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지만,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어쩌다 그를 불러주는 곳은, 같은 일을 하는 한국인이나 다른 외국인보다 더 낮은 임금을 주었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면접을 볼 때마다 피부색에 대해 지적받곤 했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를 같은 사람이 아닌, 자신들보다 못한 사람으로 본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종교단체가 마련해준 방 두 칸짜리 집은 그의 보금자리다. 이곳이 아니었으면, 서울의 비싼 주거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터다. 이 집에는 줄리 외에도 여러 난민들이 함께 산다. 방이 비좁아 간혹 주방 겸 거실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다. 함께 사는 사람들 가운데는 제3국 국적의 남편도 있다. 그는 난민 인정을 받은 뒤,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아직 부부가 따로 나와 살 수 있는 방을 마련하지 못했다. 남편에게 발급된 방문동거(F-1) 비자로는 취업을 할 수 없다. 난민의 배우자는, 가족관계가 증명되면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줄리의 남편은 자신을 난민으로 여기지 않는다. 더구나 난민이 된다는 건 모국에 갈 수 없다는 의미다. 남편의 나라로 이주하는 것조차 지금으로선 쉽지 않다. 줄리는 사실상 국적이 없다. 그의 신분을 증명해주는 건, 한국 정부가 발급한 ‘난민인정증명서’뿐이다.

 

▲ 서울에서 홀로 생활하는 한 난민이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선택한 길은 한국어 공부다. 일을 쉬는 김에 법무부가 운영하는 사회통합프로그램(KIIP) 강좌를 듣고 있다. 한국어를 무료로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앞으로 다른 이주민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것이 바람이다. “신은 나에게 (정착지로) 한국을 점지해주셨는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생활이 돼야 할 것 같다. 만약에 아니라면…. 딴 곳을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그것조차 (다른 나라) 정부가 허가해줄지 모르겠다.”

 

52명 월평균 소득 150만원

 

한국 속 난민인정자들이 생계 유지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는 다양하지 않았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난민 97명 중 절반에 가까운 45명이 공장·건설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 밖의 직업은 민간단체 활동가 및 정치인(7명), 어학학원 강사(4명), 자영업(4명) 등이었다. 최근 콩고민주공화국 출신 남민 욤비 토나(46)는 광주대 자율융복합전공학부 교수가 돼 화제를 모았지만, 이런 난민 역시 드문 사례다.

 

난민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2011년 한국인 월평균 가구소득(384만원)에 크게 못 미칠 것으로 추정된다. 설문조사 응답자 90명 중 절반인 52명의 월평균 소득은 150만원 미만이었다. 매달 50만원도 채 벌지 못한다는 이는 7명이었다. 소득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고 한 난민도 18명이나 됐다. 소득이 없는 경우는 일시적인 실업 상태거나 국외에 있는 가족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경우다.

 

크리스(가명·남)가 살고 있다는 동네엔 유독 공장이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컨테이너로 지은 공장이 그의 일터이자 집이었다. 이곳에서 돌이 채 되지 않은 딸아이가 자라고 있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운 집이다. 벌레가 많이 나와 불편하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크리스뿐이다. 공장 주인은 따로 있다. 그는 매달 130만원가량의 월급을 받는다고 했다. 한국에서 아이들이 연이어 태어났을 때 그는 주위의 도움을 받아 국민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됐다. 사정은 여전히 어려워 보였다. “이제 수급권자 아니에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오래 알고 지낸 한국인 지인이 공장을 운영해보라며 그에게 돈을 빌려준 일이 화근이 됐다. “돈도 다 돌려줬는데 (수급권자가) 안 된대요.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경우엔 괜찮다는데. 은행은 나 같은 사람한테 돈을 안 줘요. 담보도 없잖아요.”  유독 힘든 일이 많았던 지난해. 그는 잠깐 끔찍한 생각을 했다. “한국인 가족이 연탄을 피워놓고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보고, 우리도 그렇게 할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법무부 자료를 기반으로 한국 속 난민인정자들을 성별로 분리해보면, 남성(227명)이 여성(107명)보다 2배가량 많다. 연령별로 나눠보면 30~40대가 221명으로 전체 난민인정자의 66.1%를 차지한다. 40~50대에 접어드는 난민들은 노후에 대한 불안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당장 먹고살기에 바빠 미래를 준비할 여력이 없는 탓이다. 버마 출신 멍박(가명·남)은 50대다. 2000년대 초반 홀로 한국에 들어와 10년째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 역시 공장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까지 6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앞으로 10년은 더 거뜬히 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일하는 공장에서는 따로 퇴직금을 주지 않는다. 4대 보험 가운데 자비로 의료보험에만 가입한 상태다. 아직 모국엔 10대 막둥이가 있다.

 

노후에 대한 불안감 커져가

 

20대 후반에 한국으로 온 아프리카 출신 패트릭(가명·남)은 곧 마흔을 앞두고 있다. 험한 일을 해오던 그는 지난해 갑자기 건강에 빨간등이 켜졌다. 더불어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다. 아이들이 아직 어린데다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건설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지금 일은 너무 힘들다. 나도 이제 뭔가 쓸모 있는 일을 하고 싶다.”

 

현재 직업이 없지만, 빈곤층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난민도 있었다. 극히 드문 경우다. 아랍권 국가 출신으로 아칸(가명·남)은 2000년대 후반 한국으로 온 뒤 단 한 번도 일을 하지 않았다. 고향을 떠날 때 미리 1년 정도 먹고살 돈을 마련해놨다. 지금은 제3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아내가 생활비를 지원한다. 서울 시내의 한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그는 KIIP를 통해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고시원을 주거지로 택한 것도, 인근 지역 한국어 수업의 질이 더 높다고 생각해서다. 부모는 아들이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종교적 박해를 사유로 난민이 됐다는 건 모른다. 한국으로 들어온 또 하나의 이유는 아내 때문이다. 모국과 아내의 나라는 관계가 좋지 않다. “마치 남한과 북한 같은 사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 거다.” 그러나 아내의 나라와 한국의 관계는 우호적이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면, 아내의 나라를 오가는 데 수월할 것 같다. “내 경우엔 한국에서 정착하는 무엇인가가 필요하진 않았다. 그러나 다른 난민들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바로 다음주의 생계를 고민하는 이도 있고 영어나 한국어를 못하고 모국어만 쓸 수 있는 사람도 많다. 한국의 난민 지원 제도가 많이 바뀌어야 한다.”

 

 

위험한 신원 노출

 

얼굴 싣지 말아주세요

 

Please, Can you not put the picture on the article?(기사에 사진을 게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9월18일 밤, 아프리카에서 온 난민 레오(가명·남)는 기자에게 조심스러운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인터뷰 중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미국인 친구와 이웃이 많다. 내가 아프리카 출신임을 알면 그들은 나를 무시할 것이다. 친구들도 자신을 미국인이라고 말하지, 아프리카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버마(미얀마) 출신 비정부기구(NGO) 활동가나 욤비 토나 등 이미 잘 알려진 난민 외에, 난민 대부분은 신원 노출을 극도로 꺼렸다. 이름뿐 아니라 출신국도 표기하지 말 것을 거듭 요청했다. 버마(135명)·방글라데시(69명)·콩고민주공화국(27명) 등을 제외하면, 각 출신국별 난민 수는 20명을 넘지 않는다. 더구나 난민 개개인의 사연은 개별적이고 특수하다. 어느 ‘대하드라마’ 못지않은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지면에 옮기기 쉽지 않은 까닭이다.

 

신변 위협에 노출될 가능성도 있다. 한국 사람들의 인종차별과 선입견은 그들을 더욱 꽁꽁 숨게 만든다. 아프리카 출신 여성 난민은 언제든 기회만 있으면 한국을 떠나고 싶다.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데 항상 백인·필리핀인·흑인 순서대로 임금이 내려간다. 학부모들도 나를 싫어한다.”

 

설문조사 과정에서 그동안 한국에서 겪은 일을 상세히 말한 버마 출신 난민은 재차 전화를 걸어와 “절대 기사화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난민 처우 문제를 지적하면서, 법무부에 ‘찍힐까봐’ 걱정하는 난민도 있었다. 국제법으로 체류권을 보장받고 있지만, 난민들이 겪고 있는 추방에 대한 공포는 일반인이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글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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