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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례] 국제사회가 찾아준 ‘제3의 땅’으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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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0-03-21 작성자 : UNHCR 조회 : 8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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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부탄 난민 ‘재정착지로’

 

국제사회가 찾아준 ‘제3의 땅’으로 출발

네팔 동부의 벨당기2 난민 캠프에서 지난 7일 미국에 재정착하러 떠나는 버스에 올라탄 한 여성이 출발 전 친구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눈물을 닦고 있다.

 

 막 떠오른 태양이 대기를 데우기도 전 인 지난 7일 아침 6시, 네팔 동부의 부탄 난민촌 중 하나인 벨당기2 캠프. 방 두 칸짜리 대나무 오두막 앞에서 주민들이 서성이고, 흐릿한 호롱불 아래 시톰 모굴(18)과 여덟 식구가 짐싸기에 여념이 없다. 모굴 등 가족 5명은 이날 미국 시카고로 떠난다. 나머지 식구도 몇 달 안에 미국으로 합류하나, 가족들의 얼굴엔 착잡한 그림자가 짙었다. 17년 고된 타향살이 끝에 떠나는 자식들의 이마에 붉은색 ‘티카’(행운과 건강을 기원하는 분가루)를 발라주던 모굴의 할머니가 참았던 눈물을 떨궜다.


 태어나자마자 부모 등에 업혀 네팔로 온 시톰에겐 벨당기2 캠프가 세상의 전부였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도 가보지 못한 그에게 “미국에 가면 무얼 하고 싶냐”고 물었다. “전부요. 그곳에 가면 뭔가 새로 시작할 게 있겠죠”란 답이 돌아왔다. 모굴 가족을 비롯해 이날 부탄 난민 144명이 새로운 삶을 찾아 미국으로 떠난다. “친한 사람들은 다 떠나고 이제 우리만 남았네요.” 국제이주기구(IOM)가 마련한 차에 올라타는 친구를 지켜보던 파비트라 모고르(25·여)가 말했다.


 부탄에서 네팔로, 다시 네팔에서 머나먼 이국땅으로 흩어지는 시련이 시작된 건 1990년부터다. 19세기 부탄으로 이주한 네팔계 로트샴파스족은 부탄의 종카어 대신 네팔어를 사용하고, 불교로 개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민권을 뺏긴채 쫓겨났다. 서너 가정이 네팔 동부의 친척집을 찾은 것이 긴 타향살이의 시작이었다. 1991년 네팔 동부에 첫 난민촌인 티마이 캠프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18년동안 난민촌은 7곳으로 늘었다. 지난 10월30일, 난민촌의 막둥이 비벡 비수아가 태어나는 등 8만명이었던 난민 수는 10만8천여명으로 불어났다. 난민에게 그 시간들을 “버려진 시간”이었다.

 


 부탄은 지난 3월 첫 민주적 선거를 치르고, 옥스퍼드대학 출신 젊은 왕이 새로 취임하는 변화가 있었지만, 난민 문제에 한해서는 ‘원래 네팔인이었던 이들이 네팔로 돌아갔을 뿐’이란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계속된 협상이 실패로 끝난 뒤 국제 사회는 이들 난민을 제3국으로 재정착(리세틀먼트)시키자는 대안을 내놓았다. 타이에 있던 미얀마 난민이나, 아프리카 일부 국가의 난민들이 제3국으로 재정착한 사례가 있긴 하지만, 10만명이나 되는 대규모 난민의 제3국 수용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2006년 미국이 6만명의 난민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돌파구가 마련됐다.


이후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덴마크·노르웨이·네덜란드가 이 대열에 합류했고, 네팔 정부도 지난해 12월부터 출국 비자 발급 등을 돕겠다고 나섰다. “난민이란 ‘짐’을 전 세계가 함께 나눈다”는 인식이 받아들여진 것이란게 유엔난민기구(UNHCR)의 설명이다.


 정작 난민들은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는 공작”이라며 마뜩잖아했다. 난민해방군(RLA) 등이 재정착 반대 운동을 벌여, 지난해 5월에는 재정착에 관심을 보인 난민촌의 캠프 지도자가 난민해방군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탄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지난해 2명(성폭력 피해자)에 불과했던 재정착 난민은 올해 10월까지 6천명으로 늘었다. 이미 절반이 넘는 6만명이 재정착할 뜻을 밝혀, 이 가운데 2만4천명은 재정착 대상 국가에 신청서가 제출됐다.


 아이들을 캠프 안에만 묶어 둘 순 없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현재 7개 캠프에는 17살 이하 아이들만 40% 이상이 넘는다. 아이들은 난민촌 안에서 고등학교 과정(10학년)을 끝낸 뒤 마을로 나가 플러스2 과정(11~12학년) 이상을 공부해도, 배운 걸 활용할 기회는 없다. 네팔 안에서 일할 권리까지 보장받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자낙 날 시와코티(54)는 “자식들 때문에 떠밀리듯 재정착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아직도 “오렌지 도매상을 하며 3층짜리 집을 짓고 떵떵거리며 살던” 부탄으로 돌아갈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다막(네팔)/글·사진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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