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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우리가 거부한 망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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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4-07-17 작성자 : 유엔난민기구 조회 : 8211

원문보기: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35558.html

 

우리가 거부한 망명자들

 

 

2006년 콩고에서 정치적 박해를 피해 한국에 온 난민 에스더가 지난 10월1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난민지원단체 ‘피난처’에서 청소를 하고 있다. 난민 인정 심사에서 탈락하고 미등록체류자가 된 에스더는 난민지원단체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계를 잇고 있다. ⓒ정용일

 

떠날 수도 없고 머물 수도 없다. “발을 잘라낸 것만 같아요.” 에스더(46·가명)는 매일 아침 생각한다. 어디까지 시계를 돌려야 할까. 가수인 남편이 반정부 메시지가 담긴 노래를 만들기 전으로? 고국인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도망쳐 나오기 전으로?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하기 전으로? 돌이켜야 말짱 헛일이다. 아프리카 중서부에서 태어난 에스더와 그녀의 가족은 아시아 대륙 끝 한국에서 꼼짝없이 미등록체류자(불법체류자) 신세가 되었다. 거부당한 망명자(Failed Asylum-seeker)를 위한 땅은 없었다.

 

1차 심사 통과한 비율 3%도 채 안 돼

 

고향 콩고는 지독한 내전을 겪었다. 1998~2003년 5년 새 400만 명이 숨지고 2500만 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내전이 종결된 뒤에도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과도정부는 정적을 숙청하고 여성과 아이들을 학대했다. 에스더의 남편 디디에(51·가명)는 콩고의 음악가였다. 2005년, 디디에는 카빌라 대통령을 비판하는 곡을 썼다. “르완다의 도움으로 집권한 카빌라가 외국인들과 손잡고 나라를 다스린다”고 조롱했다. 2005년 10월20일, 무장한 괴한들이 한밤중에 집으로 쳐들어와 디디에의 음반을 빼앗아갔다.

 

그 순간, 디디에는 공연 때문에 지구 반대편 나라 한국에 있었다. “괴한들에게 공격을 받고 그들이 돌아올까봐 너무 무섭다”고 아내는 말했다. 고국으로 돌아가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돌아가는 대신, 한국으로 망명하고 가족을 부르기로 했다. 공연을 하면서 둘러본 한국은 충분히 인정 넘치는 나라 같았다. 콩고에 4명의 아이를 두고 올 땐, 난민 인정을 거부당하는 데 6년의 세월이 걸릴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남편의 부름을 받고 2006년 6월 에스더가 한국에 왔다.

 

부부는 난민 인정 심사에서 나란히 불허 처분을 받았다. 이의신청을 했지만 2차 심사도 불허됐다. 2011년 8월 대법원에서 패소함으로써 기나긴 행정소송마저 막을 내렸다. 처음엔 버틸 만했다. 난민신청자는 최종 심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인도적 체류’ 차원에서 기타(G-1) 체류 자격을 받는다. 한국 정부의 지원은 전혀 없었지만 디디에가 가죽공장 등을 전전하며 번 돈으로 삶을 이어갔다. 2008년엔 딸 잔느(5·가명)도 낳았다.

 

6년의 세월은 아무것도 보상해주지 않았다. 법무부는 “(설령 에스더 부부가 사건의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박해를 받을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에스더 부부의 신청을 기각했다. 이미 콩고 정부의 과도기 체제가 종결됐다는 것이었다. 내전 뒤 콩고에서 정부방위군에 의한 학살, 고문, 학대 등이 자행되는 것은 자명하다. 한국 사법부가 ‘근거 없다’고 판단한 에스더 부부의 공포는 콩고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반군과 정부군의 대립은 끝나지 않았다. 지난 8월엔 디디에와 함께 활동하던 뮤지션 알레인 몰로토가 독살당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부부의 진술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었다. 괴한이 들이닥쳐 디디에의 음반을 빼앗아간 시각에 대해 “2005년 11월 밤 11시께였다”고 주장한 반면 아내 에스더는 “2005년 10월 새벽 3시께였다”고 주장한 것 등이 다르다는 거였다. 한국 사법부가 내놓은 판단을 에스더 부부는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다. “남편은 당시 한국에 있으면서 내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이었어요. 어떻게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알겠어요.” 한국에서 난민으로서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를 인정받은 이들이 전체 신청자의 6%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에스더는 나중에야 알았다. 그나마 가족이 이미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가족결합’으로 인정받은 난민인정자를 제외하고 법무부의 1차 심사를 통과한 비율만 따지면 올해 6월 말 기준 3%도 채 되지 않는다. 전세계 평균 난민인정률(난민신청자 대비 난민인정자 비율)은 38%에 이른다.

 

난민 불인정 처분 뒤 국제미아 1천 명

 

 

인정받지 못한 난민신청자의 삶은 곧장 나락에 떨어진다. 한국에서 삶을 지탱하려면 돈을 벌어야 하지만, 어떤 자격도 없는 미등록체류자 신분이 되면 공장에서도 일할 수 없다. 2010년 법무부의 난민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난민불인정자의 대부분은 파트타임(36.6%)이나 일용직(35.7%)에 종사하고 있다. 보고서는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가진 난민의 경우 정규직을 통해 안정된 취업을 하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대부분 파트타임이나 일용직 근로를 통해 생계를 연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업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에스더 가족도 다르지 않았다. 난민 심사에서 최종 탈락한 뒤 ‘기타 체류 비자’가 효력을 잃으면서 디디에는 더는 공장에서조차 일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 일감이 있을 때마다 인근 교회의 양계장에서 닭에게 모이를 준다. 에스더는 일주일에 한 번 난민지원단체의 사무실을 청소하고 5만원을 번다. 월세 40만원을 내려면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콩고에 두고 온 아이들에게 생활비를 보내줘야 하지만 이도 사치다. 부부의 호주머니는 비어 있는 날이 더 많다. “매일 바퀴 속을 도는 것 같은 생활”이라고 에스더는 말했다.

 

더 큰 걱정은 따로 있다. 2년 뒤면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할 잔느의 앞날이다. 한국에서 낳은 딸은 피부만 검은 한국 아이다. 모국어인 프랑스어나 영어보다 한국말로 유창하게 수다를 떤다. 주위의 도움으로 겨우 교회 부설 유치원에 다니게 됐지만, 국적 없는 아이는 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 잡히면 추방이다. ‘모든 아동은 출생 후 즉시 등록되며, 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유엔 아동권리협약은 대한민국의 국경 안에선 선언적 명제에 그친다.

 

한국 땅을 벗어날 마음이 에스더 가족에겐 없을까. “한국을 떠날 경제적인 방법도 없고, 여권도 없어요. 떠나도 갈 곳이 없고요. 제3국이오? 여건이 된다고 해도 달리 아는 곳이 없는걸요.” 에스더가 눈물을 글썽였다. 난민불인정자 대부분의 처지가 그와 다르지 않다. 법무부 실태조사 당시 304명의 응답자 가운데 63.8%(194명)는 “난민 인정이 불허되더라도 어떻게든 한국에 머물 것”이라고 답했다.

 

에스더 부부처럼 난민 불인정 처분을 받은 뒤 국내를 떠도는 국제미아 수가 어림잡아 1천 명에 이른다는 것이 ‘난민인권센터’의 추산이다. 미등록체류자 단속에만 열 올릴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실태조차 파악되지 않는 난민불인정자들을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난민 선진국’인 캐나다 정부는 난민 심사에서 탈락한 이들이 자진 귀환 의사를 밝힐 경우 귀국 항공권과 2천달러까지 현금을 지원하는 등의 제도로 난민들의 본국 귀환을 돕고 있다.

 

전향적인 난민 인정 판단 필요

 

‘인도주의’ 관점에서 사전 구제 폭을 넓혀야 한다는 지적은 그보다 앞선다. 김성인 난민인권센터 사무국장은 “세계적으로 난민인정제도는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한 마지막 구제책으로 작동한다. 난민 불허 뒤 구제도 필요하지만, 한 사람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만큼 난민 인정 절차에서 다른 행정행위와는 다른 전향적인 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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