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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개인사가 곧 세계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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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4-07-17 작성자 : 유엔난민기구 조회 : 9503

원문보기: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35510.html

 

개인사가 곧 세계사다

 

 

4.1초’. 전세계적으로 난민 1명이 발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가 지난 6월 발표한 연례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시리아·아프가니스탄·소말리아 등 분쟁 지역을 중심으로 760만 명의 난민이 생겨났다. 2012년 말 기준으로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는 난민은 약 1050만 명이다. 이들과 비슷한 박해를 받고 있으면서도 외국으로 탈출하지 못한 국내 실향민은 약 2천만 명이다. 국외 난민 1050만 명 가운데 극히 일부인 26개국 334명(2013년 7월 기준)이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가까이는 중국, 멀리는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다. 난민들의 특수한 개인사는, 보편적인 세계사였다. 식민지·탈냉전 시대 이후 불거진 정치적 소요와 대규모 개발은 제3세계 민초들의 삶을 뒤흔들었다. 한국인도 이러한 파고를 피하진 못했다. ‘국민과 난민 사이’ 기획 연재 두 번째는 한국에 살고 있는 난민들은 누구이며, 어떤 이유로 한국에 오게 됐는지를 살펴본다. 15개국 출신 난민 97명에 대한 추적조사와 5개국 14명에 대한 심층 인터뷰를 토대로 열쇳말 다섯 가지를 꼽았다. 복잡한 난민 세계를 탐색할 길잡이다. _편집자

 

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

 

▲ 방글라데시 치타공 산악지대에서 살아온 소수민족(줌머)출신인 로넬 차크마 나니가 9월29일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에 위치한 재한줌머인연대 사무실에서 열린 ‘재한 줌머인을 위한 머니힐링’ 강연에서 통역을 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난 아우틴(33·가명)은 12살 때 고향을 등졌다. 에리트레아가 에티오피아에서 분리독립을 한 건 그 무렵이었다. 애초 한 나라였다가 갈라선 두 나라의 분쟁은 그를 머나먼 땅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게 했다. 2천여 년간 하나의 왕국을 이루던 두 나라에 균열의 씨앗이 싹튼 건, 19세기 말 이탈리아가 에리트레아 지역을 통치하면서부터다. 에티오피아는 1935년 무솔리니에게 점령당하기 전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경제적 상황과 통치 체제의 변화는 민족적 정체성 분리로 이어졌다. 결국 1993년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에서 분리독립한다. 1998년 벌어진 양국 간 전쟁은 2년 동안이나 이어진다.

 

땅은 쉽게 나눌 수 있어도, 사람은 그렇지 않다. 아우틴은 에티오피아에서 나고 자란 에리트레아계 사람이었다. 두 나라 간 갈등이 깊어질수록, 에리트레아 피가 섞인 사람들의 설 자리는 줄어들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아우틴은 형과 함께 보트를 타고 케냐로 향했다. 형제는 그곳에서 6년이란 세월을 보낸다. 형은 고향 상황이 나아졌는지 알아보러 길을 떠났다. 같이 가겠다는 동생의 손을 애써 뿌리쳤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케냐에 혼자 남겨진 아우틴은 브로커에게 100만원을 건넸다. 가짜 여권 발급과 유럽행에 대한 대가였다. 비행기에서 내린 곳은 엉뚱하게도 타이였다. 브로커와는 연락이 닿질 않았다. 낯선 땅에서 만난 아프리카인은, 차라리 한국에 가서 일을 하라고 일러주었다. 10여 년 전, 아우틴은 그렇게 해서 한국으로 들어왔다.

 

난민들의 삶에는 서구 열강의 침략과 냉전시대 이후 남겨진 종족 간 분쟁, 정국 불안 등 근·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에단(36·가명)은 스스로를 ‘영국계 카메룬 사람’이라고 불렀다. 프랑스계 카메룬 사람들이 영국계를 잔혹하게 몰살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런데 카메룬을 영국계·프랑스계로 나눠 부르는 건 무슨 까닭일까? 19세기 말 카메룬을 점령한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며 프랑스와 영국이 카메룬 땅을 쪼개 1960년까지 통치했다. 두 지역 사람들이 다른 정체성을 갖게 된 배경이다.

 

법무부 자료(2013년 6월 말 기준)를 보면,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유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건 ‘정치적 의견’으로 인한 박해(약 38%)였다. 버마(미얀마)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대표적이다. 1988년 8월8일 버마에선 군부독재를 규탄하는 8888민주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당시 랑군대학에 재학 중이던 버마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 내툰나잉(44) 회장은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해인 1994년, 그는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 건너온다. 5·18 광주 민주항쟁 등을 거친 한국 시민사회를 공부하고 싶었다. 중국에서 온 난민 중에도 민주화운동을 하다 중국 공안의 탄압을 피해 한국행을 택한 이들이 있다. 최근에는 중국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소송을 통해 난민 지위를 인정받는 추세다.

 

국민에서 배제된 사람들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에 위치한 허름한 건물 2층에는 ‘재한줌머인연대’(JPNK)라는 낯선 단체의 사무실이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난민 70명 가량이 모여산다. 한국인과 유사한 외모를 지닌 사람도 있다. 방글라데시 치타공(CHT)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10여 개를 통칭하는 ‘줌머’(화전민을 뜻함)들이다. 한국에선 이들의 국적을 방글라데시로 분류하지만, 엄밀히 말해 줌머에겐 국가가 없다. 18세기 이후 본격 형성된 국민국가는 언어·문화·전통 등 공통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유지됐다. 그러나 전세계엔 이런 ‘국민’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있다. 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국가 없는 종족, 선주민(토착민·근대국가 이전부터 그 토지에 살고 있던 사람들로, 현재 주류 사회와는 다른 독자성을 가진 집단)이다.

 

▲ 경기도 시흥시에 위치한 한 아프리카 출신 난민인정자의 집. 한국행을 스스로 결정한 난민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한국에 정착하게 된 경우도 있다.

 

줌머들이 살던 산악지대를 포함한 벵골 지역은 지난 1세기 동안 3개 ‘국가’가 들어섰다. 1860년 영국의 식민통치가 시작됐다. 1947년 식민지배가 끝나자 파키스탄이라는 국가로 독립한다. 당시 정부는 치타공 산악지대 지역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한다. 농지의 40%가 수몰돼 10만 명의 줌머가 생활 터전을 잃었다. 벵골어를 쓰는 동파키스탄이 독립해 1971년 방글라데시가 생겨난다. 정부는 국가 정체성을 ‘벵갈리족의 나라’로 규정하고 강력한 동화 정책을 실시했다. 소수민족들은 ‘줌머’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무장투쟁에 나선다. 1997년 자치주 독립을 약속받는 평화조약이 체결됐지만, 현재까지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줌머 난민은 약 2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한국뿐 아니라 프랑스·일본·영국 등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줌머가 한국에 들어온 건 1990년대 초반이다. 고교 시절부터 자치권 운동에 참여한 로넬 차크마 나니(41)는 인도·타이 등을 거쳐 1994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당시 한국 거주 줌머는 10여 명에 불과했다. 1997년 평화협정 체결 소식이 들려오자,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줌머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자 로넬은 한국으로 재입국해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재한줌머인연대가 결성된 건 2002년이었다.

 

버마 출신 난민 중에도 줌머와 비슷한 경우가 있다. 민족이나 종교로 인한 박해를 이유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버마 내 소수민족은 친·카렌·로힝야족 등이다. 이 가운데 수가 가장 많은 이들은 친족으로 대부분 기독교를 믿는다. 사는 지역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친족 간에도 의사소통은 쉽지 않다. 카렌은 크게 불교도와 기독교인으로 나뉜다. 주로 타이 인접 지역에 사는 이들은 불교도가 많다. 이에 반해 로힝야는 무슬림이다. 버마 정부는 로힝야를 벵갈리족으로 보고 국적을 부여하지 않는다. 무슬림에 대한 버마 불교도들의 학살은 현재진행형이다.

 

 

한국행은 필연? 우연?

 

난민들은 어떤 이유로 한국에 왔을까. 유엔 사무총장이 한국인임을 알고 한국행을 택한 난민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이 땅에 정착하게 된 난민도 있다. 설문조사에 응한 난민인정자 76명 중 15명은 한국에 다른 목적으로 들어온 뒤 반정부 활동 등으로 인해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고 했다. 우즈베키스탄 알리샤(42·가명) 부부는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한국으로 입국했다는 사실이 고향에 알려져 돌아갈 길이 막혔다. 우즈베키스탄 주민 대부분은 무슬림이다.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들어와 난민으로 인정받은 버마 사람들도 비슷한 경우다.

 

’브로커의 소개’(14명), ‘다른 나라에 갈 목적으로 입국했으나 출국하지 못해서’(5명), ‘한국인 줄 모르고 입국’(4명)한 경우도 있었다. 이란 출신 샤하디(26·가명)는 원래 캐나다로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도와주던 브로커가 그를 한국으로 이끌었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난민’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사람들이 난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줌머들처럼, 고향 사람이나 가족이 거주하기 때문에 한국에 왔다는 난민은 18명이었다. 9명은 비자가 필요 없는 등 입국 조건이 까다롭지 않아 한국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위기에서 탈출할 기회를 엿보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도 한다. 부족 사람들에게 ‘여성 할례’(성기 절단)를 강요받던 우간다 여성은 한국 교회 프로그램에 참석할 기회가 생겨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여동생 역시 같은 사유로 미국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주민에게 관대할 것이라고 생각해 한국행을 택한 난민은 7명이었다.

 

이동 거리는 경제 상황과 비례

 

나이지리아 출신 낸시(49·가명)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5년간 살다, 2007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기독교를 믿는 그는 무슬림인 친·인척들로부터 목숨을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고향에서 가장 먼 곳이, 그에게는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나라 밖 난민은, 나라 안 난민에 비해 경제적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다. 국경을 넘으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난민들의 최초 피란처는 주로 이웃 나라다. 그러나 인접국도 가난하거나 비슷한 정치적 불안을 겪는 경우가 많다. 결국 더 나은 환경을 가진 나라로 재이주도 하는데, 이러한 난민은 소수로 분석된다. 카메룬 출신 에단은 “아프리카에서 한국으로 오기 위한 비행기 삯은 2천달러가 넘는다”며 “대학 교육을 받아 인터넷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 거주하는 아프리카 출신 난민들은 아시아인보다 난민에 대한 개념을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제이주기구(IOM) 연구원 출신으로 현재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대학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철효씨는 “한국에서 난민신청자를 상담할 당시, 아시아 출신들은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했다 체류 기간이 끝날 때쯤 난민신청서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사정은 난민 심사 과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난민’에 대한 개념을 잘 몰라 신청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도 ‘난민’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 나라를 배신했다고 여겨, 스스로를 ‘난민’이라고 이야기하는 걸 꺼리는 경우도 있다. 이에 비해 아프리카 출신들은 난민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경우가 많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아프리카 출신 난민 15명 중 9명은 유럽이나 캐나다·미국 등에 난민으로 사는 친·인척이 있었다.

 

 

버마에서 온 사람들의 경우 난민 130여 명뿐 아니라 경제적 이주민과 학생 등 약 1만 명이 한국에서 살고 있다. 버마 난민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나라는 고향에서 육로로 이동이 가능한 인접국 타이다. 타이에는 약 300만 명의 버마 사람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내퉁나잉 NLD 회장은 “말레이시아·싱가포르에는 30만 명이 거주하는데, 이곳까지 가려면 최소 20만~100만원의 비용이 필요하다. 한국으로 건너가려면 500만원가량의 비용이 들고, 영국·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 등으로 입국하려면 1만달러(약 1천만원)는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일본에 비해 한국 거주 버마 사람들은 남성 비율이 훨씬 높다. 한국어를 못하는 이들이 구할 수 있는 일자리가 주로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가짜 여권 필요해

 

버마 소수민족 출신 라니(39·가명)는 18살 때 고향을 떠나 인도로 건너갔다. 버마와 인접한 인도 지역은 같은 언어를 쓰는데다, 여권이 없어도 대학 공부가 가능했다. 그가 반정부 단체 활동을 도운 사실이 인도에 사는 버마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고향에 돌아갈 수도, 인도에 더 이상 머물기도 힘들어졌다. 그렇다고 국경을 넘는 데 필요한 서류가 있지도 않았다. 결국 브로커에게 200만원을 주고 가짜 여권을 만들었다.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그는 한국에 올 수 없었을 것이다.

 

<한겨레21>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 난민 80명 가운데 47명은 한국 입국 전에 출신국이 아닌 제3국에서 체류한 경험이 있었다. 나라 밖으로 떠난 난민들이 다시 한번 국경을 넘기 위해선 신분을 증명할 ‘여권’이 필요하다. 그러나 출신국에서 여권을 발급받기란 어렵다. 결국 현지에서 만난 브로커를 통해 가짜 여권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버마는 합법적으로 출입국 서류를 만드는 경우에도 브로커를 통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고 알려졌다.

 

스티븐 카슬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대학 석좌교수와 마크 밀러 미국 델라웨어대학 교수는 공동 저작 <이주의 시대>에서 이주의 흐름을 조직해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람들을 포괄하는 ‘이주 산업’이 성장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불법’에는 늘 사기의 위험이 있기 마련이다. 국내에도 난민 등 이주민들의 등을 치는 악성 브로커가 있다. 난민인권센터 김성인 사무국장은 “난민 신청만 하면 난민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속이는 사건이 가장 빈번하다”고 전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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